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18 민주화운동/전개 (문단 편집) === 최후의 저항, 항쟁의 완성 === [youtube(79ZqoRyWwAY)] || [[파일:김성용 신부.jpg|width=200]] || [[파일:국군통합병원 부근의 대치선.jpg|width=410]] || [[파일:홍남순 변호사.jpg|width=200]] || || [[http://www.siminsori.com/news/articleView.html?idxno=56903|김성용]][*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는 5.18 당시 남동성당에서 본당신부로 사목하고 있었다. 그는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하여, 시민들의 항쟁을 옹호하고 사태 수습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5.18 이후 1년 2개월의 징역을 살았다. 이후에는 [[사제]]로서 사목활동을 계속하다가 2004년부터 은퇴하여 원로사제로서 [[완도]]에서 거주 중이다.] 신부 || 국군통합병원 부근의 대치선 || [[http://news.joins.com/article/20731559|홍남순]][* 홍남순은 광주 지역에서 활동한 민주화운동가이자 변호사로서, 70년대 여러 시국사건에 뛰어들어 민주화운동가들을 변호하였다. 5.18 때에는 수습대책위원회에서 열심히 활동하며 사태의 수습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로 인해 5.18 이후 1년 7개월 정도를 복역해야 했다. 출소 후에는 80년대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이후에도 사회운동에 헌신하다 2006년 뇌출혈로 별세하였다.] 변호사 || >시간이 필요하다. 노력해서 수습한 것을 군이 약속을 깼으니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며칠을 참고 후퇴까지 한 군의 사기에 영향이 있다는 것이다. 군은 항상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타당한 말이다. '''국군은 언제나 이겨야 한다. 그러나 적군에 이겨야 하는 것이지 나라의 주인인 국민, 80만 광주시민에게 이겨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군은 절대로 광주 시내에 진입해서는 안 된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민주학생이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고 시위하고 있는 것을 총검으로 무차별하게 살상하고 울분을 참지 못한 전시민을 의거케 해놓고 지금 와서 오리발을 내밀다니... >---- >김성용 신부의 [[http://blog.daum.net/claracheon/493|일기]] 中 5월 26일 새벽 4시경, 계엄군이 화정동에서 농성동 방면으로 진출했다. 이 소식을 듣자 도청 내에서는 계엄군을 막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자, 홍남순 변호사, 이기홍 변호사,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 [[이성학]] 장로, [[조철현]] 비오 신부 등 17명의 수습위원이 서로 모여 회의를 했다. 여기서 김성용 신부는 "우리가 먼저 탱크 앞에 가서 죽자"면서 수습위원들을 이끌고 계엄군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시민들이 그 뒤를 따르면서 긴 행렬이 행진했는데, 훗날 사람들은 이를 두고 '''죽음의 행진'''이라 불렀다. 일행은 1시간 정도 행진하여 농성동에 다다랐고, 계엄군의 탱크와 대치하였다. 수습위원들은 군인들에게 군대를 후퇴시킬 것을 요청했고, 군인들이 후퇴하면서 위기는 일단 넘겼다. 수습위원들은 상무대 전교사로 가서 4시간 30분 동안 계엄군 측과 협상을 벌였다. 하지만 계엄군 측은 [[몽니]]를 부리면서 "오늘 중으로 무기를 넘기고 해산하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이미 계엄군은 진압작전을 다 세워놓은 뒤였기 때문에 무엇 하나 꿇릴 게 없었던 것이다. 결국 수습위원들은 빈 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 중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와 홍남순 변호사는 [[서울]]로 가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과 [[윤보선]] 전 대통령을 만나 광주의 상황을 알리고자 했다. 서울로 가는 과정에서 홍 변호사는 체포되고, 김 신부는 겨우 탈출하여 서울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그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27일 밤 10시로, 이미 전남도청이 계엄군에게 함락된 후였다.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90|김성용 신부가 김수환 추기경에게 쓴 호소문]]] 새벽에 계엄군이 몰려온 이 사태에 항쟁지도부는 오후의 궐기대회를 오전으로 옮겼다. 그리하여 오전 11시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갑작스러운 시간 변경에도 불구하고 3만여 명의 시민들이 도청광장 앞에 모여들었다. 시민들은 이 대회에서 계엄군의 진입이 군과 수습위 간의 협상을 위반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시민들은 [[국기에 대한 경례]], [[묵념]], 상황 보고 등을 거쳐 [[대한민국 국군]]과 [[최규하]] 대통령을 향한 메세지를 발표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민주주의]]를 열망하고 시민들을 고취시키는 시 2편이 낭송되었다. 시민들은 시가 한 구절 낭송될 때마다 똑같이 따라하며 음미하였다. 또한 항쟁지도부의 주도로 「80만 민주시민의 결의」가 발표되었다. 여기서 항쟁지도부와 시민들은 '수습' 아닌 '''[[민주화]]'''를 말함으로써 항쟁의 목적이 민주주의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궐기대회는 오후 1시까지 이어졌고, 대회 후에는 시민들이 일제히 일어서 가두행진에 나섰다. 시민들은 [[스쿨버스]]를 앞세우고 금남로를 행진하여 광주공원, [[전남대병원]] 등을 거쳐 다시 되돌아왔다.[* 한 자료에 따르면 사람들이 어찌나 많았던지 선두가 금남로에서 1km 떨어진 광남로 사거리에 왔을 때에도 후미는 여전히 도청광장에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시민들은 '우리는 싸움을 포기할 수 없다', '무기 반납은 절대로 안 된다', '살인마 전두환을 찢어죽이자'는 구호를 외쳤다.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73|80만 민주시민의 결의]]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95|계엄군의 허위약속을 폭로한다 - 시민대책위원회]]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71|과도정부의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내는 글]]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81|광주 민주시민 여러분께]]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94|전국 언론인에게 보내는 글]]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99|대한민국 언론 지성인들에게 보내는 글]]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96|대한민국 국군에게 보내는 글]]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97|정부의 오도된 보도를 바로잡는다]]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84|민주화여! - 궐기대회 당시의 시]]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86|계엄군과 광주시민 - 궐기대회 당시의 시]]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87|광주시민은 통곡하고 있다]] 오후 2시 도청 내무국장실에서 항쟁지도부는 구용상 광주시장을 만나 9가지의 사항을 요구하였다. 그 요구조건은 '① 1일 백미 1가마씩 제공 ② 부식 및 연료 제공 ③ 관 40개 제공 ④ 구급차 1대 지원 ⑤ 생필품 보급 원활히 ⑥ 치안문제는 경찰이 책임지라 ⑦ 시내버스 운행 ⑧ 사망자 장례는 도민장으로 ⑨ 장례비 지원'으로 전날 항쟁지도부가 논의를 했던 것들이었다. 부지사실에서는 [[정시채]] 부지사, 유족 대표 등과 함께 5.18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식 문제를 논의했다. 여기서는 장지는 망월동으로 하고, 날짜는 5월 28일로 잡았다. 한편 같은 시각인 2시 도청 식산국장실에서는 '''기동타격대'''가 조직되었다. 이 시민군 조직은 이전의 기동순찰대를 이어받는 것이었고, 기존의 기동순찰대원 대부분이 참여했다. 7조까지 조직된 이 기동타격대는 6개 조는 기동순찰대의 업무를 그대로 이행하였고, 나머지 한 조는 예비부대로 편성되었다. 이들은 낙오되거나 잠입한 군인들을 체포하여 군부대로 보내주었고[* 시민들은 계엄군을 체포하면 보복 없이 군부대로 돌려보냈다. 계엄군 사망자 가운데에는 시민군과의 충돌로 인해 사망한 사람은 있다 치더라도, 시민군에게 붙잡혀 보복행위를 당해 죽은 사람은 없었다. 반면에 시민들이 계엄군에게 붙잡혔을 때 군인들은 시민들에게 무자비한 고문과 보복을 가했으니 참으로 대비되는 대목이다.] 순찰활동을 도맡았다. 약 40~70명 정도가 기동타격대원으로 활동했을 것을 추측된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전면개정판)>에 따르면 현재까지 신원이 명확히 밝혀진 기동타격대원은 31명이라고 한다. 이들은 만약 항쟁이 진압될 시 서로를 불 것을 걱정하여 본명이 아닌 별명으로 활동하였다. 그렇기에 항쟁이 끝난 지금에는 누가 누구인지 정확히 판별해내는 것은 꽤 어려워졌다. 오직 증언과 고백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오후 3시에는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마지막으로 개최되었다. 이 궐기대회에서는 수습위원들의 절망적인 협상결과가 발표되면서 시민들은 계엄군의 진압이 임박했다는 불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많은 시민들이 올라와서 자신의 겪은 이야기들을 했다.[* 사실 시간이 흐를수록 사태의 수습은 보이지 않았고, 언제 계엄군이 밀고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라 두려움과 불안함에 시민들의 참여는 시간이 흐를수록 줄어드는 기세였다. 하지만 그래도 궐기대회는 열렸고 시민들은 모여들었다.] 어떤 이는 폭도들이 난동을 부린다는 언론 보도만 믿고 무서워 나오지 않았는데, 실제로 나와보니 보도와는 다르다면서 놀라워했다. 누군가는 [[8.15 광복]]부터 현재까지의 정치경제적 문제점에 대해 성토했다. 그런가하면 [[무등산]] 증심사에서 왔다는 한 [[스님]]은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승려]]가 살상이 불가피한 싸움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여 눈길을 끌었다. 이 대회에서는 오전에 있었던 대회에서 발표된 글들이 재차 발표되었으며, 보다 온건한 투로 4개 항목[* ① 서울을 비롯한 모든 시외전화의 소통을 호소합니다. ② 이번 봉기사건에 대해서 모든 보도기관의 자유로운 취재활동과 검열없는 보도를 호소합니다. ③ 사망자와 부상자 및 행방불명자의 확실한 숫자를 밝히기 위하여 계엄당국과 시민군의 공동조사단을 구성할 것을 호소합니다. ④ 국군은 광주시민과 민주시민을 학살할 게 아니라 전선을 지킬 것을 호소합니다.]을 호소하기도 했다. 궐기대회가 끝날 즈음 항쟁지도부는 '''오늘밤 계엄군이 공격해올 가능성이 크다'''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궐기대회 이후 5천여 명의 시민들은 금남로를 거쳐 계엄군과의 대치지역까지 이동하여 행진하고는 도청으로 돌아왔다. || [[파일:윤상원 열사 영정.jpg|width=210]] || [[파일:전남도청과 그 일대.jpg|width=400]] || [[파일:도청 안을 지키고 있는 시민군.jpg|width=160]] || ||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1950)|윤상원]] || 전남도청(현재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그 일대 || 도청 안을 지키는 시민군 || >학생수습위원회가 항쟁파와 투항파로 나뉘어서 싸우고 있는거야. 정상용, 김종배는 이 참혹하게 죽은 시신을 놔두고 절대 도청을 나가지 않겠다고... 김창길은 5시 이후에는 나가겠다고... 그 꼴을 보니 속이 뒤집혀서 "비극 속에 비극을 보는 것 같다. 모두 힘을 합쳐 싸워도 모자라는 판에 이게 무슨 추태냐. 나는 이런 꼴을 못 보겠으니 내가 나가겠다"라고 호통을 쳤어. 김창길이는 끝내 도청을 나갔어... 정상용과 김종배가 '''"우리는 모두 죽고 단 한 사람이 남더라도 끝까지 여기 있겠습니다. 우리는 못 나갑니다. 우리와 함께 최후까지 일을 합시다"'''라고 울면서 말했어. 그 때가 7시쯤 되었을 때야. >---- >YWCA 회장 [[http://mpva.tistory.com/1965|조아라]][* 조아라는 1912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927년 [[YWCA]]와 인연을 맺으면서항일운동과 여성운동에 뛰어들었고 [[광주학생항일운동]]에도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8.15 광복]] 이후에는 전남광주 지역에서 YWCA 활동을 활발히 하다가 5.18 당시에는 YWCA 회장으로서 사태의 수습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녀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인해 그녀는 '''민주화운동의 대모''', '''광주의 어머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5.18 이후에는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뤘고, 8~90년대에도 사회운동에 투신하여 활발히 활동하다가 2003년 타계했다.]의 증언 中 >이 무렵 도청 앞에는 200~300여 명의 시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때 어떤 젊은이가 메가폰을 들고 "여러분,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기꺼이 죽어도 좋다는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돌아가십시오.''' 오늘밤 계엄군이 쳐들어오면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그리고 전멸할 것입니다"라고 외쳐댔다. 그러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비장한 각오가 서려있었다. '광주'는 마지막 고비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 ><5월 18일 광주>, [[김영택(1936)|김영택]], 역사공간, 2010, p519 그러나 이런 피 어린 애절한 호소와 저항은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결국 26일 오후 5시 도청 대변인실에선 처음이자 마지막 외신 기자회견이 열렸다. 대변인 [[https://brunch.co.kr/@1980may18/123|윤상원]]은 10여 명의 외신기자들 앞에 섰다.[* 여기에 참석한 외신기자는 《[[뉴욕타임즈]]》 동경지국장 헨리 스콧 스토코스(Henry Scott Stokes), 《[[뉴욕타임즈]]》 서울 특파원 심재훈(Shim Jae Hoon), [[AP통신]] 기자 테리 앤더슨(Terry Anderson), 《[[요미우리신문]]》 기자 마쓰나가 세이타로(松氷成太郎), [[독일]] NDR 방송기자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 《볼티모어 선》 기자 브래들리 마틴(Bradley Martin), 《쥐트도이체 차이퉁》 기자 게브하르트 힐셔(Gebhard Hilsher) 등이었다.] 통역은 미국선교사 집안의 [[인요한]](John Linton)이 맡아주었다. 기자들 앞에서 윤상원은 항쟁지도부의 입장, 계엄군 측과의 협상결과 보고, 피해상황 등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와 [[국제적십자사]]에게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해달라고 부탁하였다. 3시간의 기자회견 동안 윤상원은 '''"우리는 오늘 여기서 패배하지만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라며 계엄군에 맞서 싸울 것임을 천명했다. 한 기자가 항복할 것이냐, 싸우다 죽을 것이냐고 묻자 윤상원은 "최후까지 싸울 것이다"라고 답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볼티모어 선>의 블래들리 마틴 기자는 그에 대해 "죽음의 예감 속에서도 최후의 날까지 싸우리라는 다짐이 얼굴에 잘 나타나 있다"고 증언했다.[* 서울신문 1998년 9월 10일 6면, <'폭동' 아닌 '민중항쟁' 자리매김 큰 몫 윤상원 5ᆞ18 시민군 대변인>, 임창용] 한편 정시채 부지사는 오후 5시 경 항쟁지도부 인사들을 만나서 계엄군이 27일 들어올 것이라며 빠져나갈 것을 종용했다. 오후 6시 경에는 민주투쟁위원회의 마지막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항쟁지도부 인사들과 재야 인사들을 포함해서 옛 학생수습위원회의 온건파 인사들도 모였다. 온건파인 김창길은 빨리 무기를 반납할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강경파인 정상용과 김종배 등은 여기에 반대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그렇게 충돌하던 양측은 강경파 박남선이 권총을 빼들고 강경하게 나서며 무기 반납과 투항을 주장하는 사람은 없애버리겠다고 소리쳤다. 결국 김창길 등 온건파는 밤 9시 경에 도청을 빠져나갔다.[* 그렇지만 온건파가 도청을 빠져나갔을 때 아무도 그들을 욕하지 않았다. 김창길은 도청을 빠져나가면서 도청 안의 시민군들에게 계엄군의 진입이 임박했다며 한 명이라도 더 목숨을 살리려고 애썼다. 당시 기동타격대장이었던 윤석루는 그의 그런 행동을 지켜보았지만 제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윤석루는 훗날 자신의 증언에서 "그 사람도 한명이라도 더 목숨을 구해보자고 한 일이라고 생각했지요. '''서로 입장이 달라서 그런 것이지 우리만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우리 입장은 자발적으로 남아서 도청을 끝가지 지키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만 스스로 결정해서 남으라는 것이었고..."라고 말했다.] 한편 도청 부근에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아 있던 200~300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은 시민군에 편입되었으며, YWCA에는 70여 명의 대학생이 남아 투쟁을 돕기로 하였다. 그 사이 학생과 수습위원 11명이 계엄군 측을 방문하여 진압을 늦춰달라고 요구했지만 군에서는 "무장을 해제하고 무기를 반납하라"면서 기한은 밤 12시까지라고 했다. 진압작전을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편 결전을 준비하며 시민군은 나이가 어린 학생들과 여성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부탁했다.[* 윤상원은 총을 달라는 고등학생들에게 '''"우리들이 싸울 테니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라고 설득했다. 이에 <볼티모어 선>의 브래들리 마틴 기자는 윤상원의 설득에 대해 "세계 어느 무장조직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진정한 투사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진압작전을 앞둔 시민군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시민군의 당시 상황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전면개정판)>을 많이 따랐다. 그 이유는 이 자료가 당시 진압작전을 겪은 시민군 생존자들의 증언을 참고하여 그 상황을 재구성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구역에서 정확히 몇 명이 있었는지까지는 적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그 자리에 있었던 시민군들의 이름이나 추정 숫자를 명시해놓는 수고를 하였다.] 도청에서는 상황실, 조사반, 민원실, 지하 무기고 등의 구역에서 각 항쟁지도부와 시민군 간부들과 대원들이 포진해 있었다. 시민군의 취사와 홍보를 담당하는 여성들도 그곳에 같이 머물고 있었다. YWCA에서는 70여 명의 시민군들이 [[https://brunch.co.kr/@1980may18/123|윤상원]]의 지도 아래 훈련을 받았고, 광주 시내에서는 50여 명의 기동타격대원들이 거리를 순찰하였다. 이 외에도 YMCA, 전일빌딩,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계림국민학교 등의 지역에서 적게는 10명, 많게는 수십여 명의 시민군들이 포진해 있었다. 시민군들은 최후의 저항을 준비하면서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하기도 했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오기도 했다.[* 항쟁지도부 기획위원 이양현은 아내와 슬픈 작별인사를 했다.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일 오늘 밤을 무사히 보낸다면 내일 아침 9시부터 도청에 나와서 평소처럼 밥 짓는 일을 도와주오. 그리고 애들이 아빠를 보고 싶다고 보채거든 내일은 한번 데리고 나오지. '''우리 식구가 모두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해주시오.'''" 이에 아내는 사람들이 보는 데에서 그를 붙잡고 통곡할 수가 없어서 결국 팔에 머리를 기대로 흐느꼈다. 이양현은 아내를 집으로 보내고 조용히 도청으로 돌아갔다. 그는 진압작전에서 죽지 않고 목숨은 건졌지만 결국 아내한테 한 말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다.] 자정이 넘고 새벽이 되면서 시민군들은 계엄군을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드는 경우도 있었다. {{{#!folding ※ 시민군의 병력과 방어 상황 : 보기 / 접기 || 장소 || 병력 || || 도청 및 주위[* 도청, 분수대 광장, 상무관, 수협 전남지부(현 충장로1가 공용주차장) 등] || 200여 명 || || YWCA[* 당시 광주YWCA는 금남로1가 전일빌딩 바로 뒤에 있었다. 현재 YWCA는 광주시 북구 유동으로 이전했고, 옛 건물 자리에는 카페가 들어섰다.] || 30여 명 || || YMCA[* 현재까지도 금남로1가 전일빌딩 바로 건너편에 있다.] || 10여 명 || || 전일빌딩[* 전일빌딩에 대한 헬기 기총소사가 이때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박남선(시민군 상황실장)과 홍OO(관광호텔 직원)는 "이날 새벽 3시 30분~4시경, 전일빌딩을 향한 기총소사 장면을 목격했다"는 증언을 남겼다.(출처: 국방부5.18특조위 『국방부5.18특별조사위원회 조사결과보고서』, 2017., p75; [[https://www.youtube.com/watch?v=kvvOEWpILQc#t=4m31s|박남선 증언]])] || 10여 명 ||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당시 광주시 북구 대인동에 위치해있었다. 현재 옛 터미널 자리에는 롯데백화점과 광주은행 본점이 들어섰다.] || 30여 명 || || 계림국민학교[* 현 광주계림초등학교. 몇몇 시민군은 바로 옆 광주고등학교로 퇴각하기도 했다.] || 20여 명 || || 월산동[* 현재 광주MBC 방송국이 자리한 덕림산 부근과 무진중학교 일대로 추정된다.] || 10여 명 || || 사직공원[* 공원 내 팔각정에 시민군이 배치됐다. 2014년 팔각정은 철거되고 현재 새로운 전망대가 들어섰다.] || 10여 명 || || 남광주역[* 전남대병원과 길 하나를 두고 인접해있었다. 현재 기차역은 없어지고 같은 이름의 지하철역만 남아있다.] || 10여 명 || || 금남로 한일은행[* 현재 금남로5가 사거리에 있는 우리은행 광주금융센터(위치는 동일)] || 10여 명 || || 서부경찰서[* 현재 광주서부경찰서는 서구 치평동 상무지구로 이전했다. 옛 경찰서는 현재 서구 농성동 돌고개역 바로 위쪽 농성빛여울채 아파트 자리에 있었다.] || 30여 명 || || 산수동오거리[* 시민군들 증언에 따르면 산수동오거리에서 무등산으로 통하는 길목에 10여 명이 배치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확인되지 않고 있다(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창비 2017., p443,556; 광주서석고등학교 제5회 동창회 『5.18, 우리들의 이야기』, 심미안 2019., p423).] || 10여 명 ||}}} {{{#!folding ※ 광주진압군 가용병력 및 장비 : 보기 / 접기 ||<-2> 부대(병력) || 대대수 || 인원(장교/사병) || 비고 || ||<|3> 특전사 || 3공수 || 5 || 265/1,212 ||<|3> 10개 대대 504/2,901 || || 7공수 || 2 || 92/780 || || 11공수 || 3 || 147/909 || ||<|4> 20사단 || 60연대 || 3 || 87/1,563 ||<|4> 9개 대대 279/4,667 || || 61연대 || 3 || 85/1,535 || || 62연대 || 3 || 86/1,449 || || 사단직할 || || 21/120 || ||<|6> 전교사 || 31사 || 3 || 55/1,367 ||<|6> 28개 대대[br]3,944/8,022[br](피교육생 포함) || || 보병학교 || 7 || 1,923/864 || || 포병학교 || 7 || 1,165/1,700 || || 기갑학교 || 5 || 357/1,775 || || 화학학교 || 2 || 75/253 || || 직할 || 4 || 369/2,063 || ||<-2> 합계 || 47 || 4,727/15,590 || ||}}} 한편 계엄군은 27일 자정부터 계엄군은 광주 시내의 시외전화선을 차단하고 '상무충정작전'이란 명칭으로 진압 작전에 돌입했다. 이들은 5개 방향으로 광주로 접근하여 광주공원, 관광호텔, 전일빌딩 등을 점령하고 최종 목표지인 전남도청까지 완전히 장악한다는 작전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각 부대별로는 제3공수여단이 도청을, 제11공수여단이 관광호텔, 전일빌딩, YWCA를, 제7공수여단은 광주공원을 각각 작전지역으로 맡았다. 또 제20사단은 지원동→광주천→적십자병원→전남도청 남방, 지원동→[[전남대학교병원]]→전남도청 정문, 백운동→한일은행→전남도청 정문 등 3가지 경로로 들어오고, 제31사단은 화정동→양동→유동 삼거리→금남로→전남도청 정문 경로로 들어오기로 하였다. 이 작전을 위해 47개 대대 2만 317명이 광주로 들어왔고, 이 중 실제 전투에 참여할 숫자는 6,168명이었고 특수작전을 펼칠 병력은 317명이었다. 특공조들은 시민들의 반발을 피하고자 20사단 병력으로 위장하려고 녹색 군복을 입은 상태였다.[* 당시 공수부대원들의 복장은 얼룩무늬가 그려져 있는 군복이었다. 헌데 이들이 일반 군인들의 군복을 입은 것이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장성들은 진압작전에 참여하는 계엄군들을 치하하며 진압작전을 독려하였다.[* [[전두환]]은 자신의 자필메모에서 '''"우리 공수부대 애들을 너무 기죽이지 말라"'''고 써서 소준열 전교사사령관에게 보내었다. [[황영시]]는 소준열에게 전화로 "희생이 따르다러도 사태를 조기에 수습하라"고 말했다.] [[http://db.kdemocracy.or.kr/isad/view/00714191|5월 27일 진압작전 당시 계엄군의 동선]] ||<|3> [[파일:1980년 5월 27일 광주.jpg|width=430]] || [[파일:트럭 연행.jpg|width=360]] || || 포박된 채 계엄군의 트럭에 실린 시위대. || || [[파일:망월동 묘지에서.jpg|width=350]] || || 1980년 5월 27일 진압작전 직후 || 망월동 묘지에서 관 옆에 서 있는 아이들 || [youtube(dJiREAuPmNI)] >사랑하는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 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끝까지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 >'''1980년 5월 27일, [[https://www.youtube.com/watch?v=9m8GcxSzZog|마지막 방송]]'''[* 사실, 방송에서 확실하게 어떤 말을 했는지는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다만 그 내용은 "계엄군이 쳐들어 오고 있고, 시민군은 끝까지 여기에 맞서 싸우겠으니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는 내용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새벽 2시 즈음 되어 사이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지쳐서 잠든 시민군들은 모두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시민군들은 카빈 소총과 총알을 대원들에게 배급하였고[* 생존자 증언에 따르면 카빈 소총 1정당 실탄 3발씩만 주어졌다고 한다. 이는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계엄군과 맞서기에는 너무 역부족이었다.], 도청 내의 여성들을 피신시켰다. 도청에서는 건물은 물론이고 주변 지역 구석구석에 시민군들이 포진하였다. YWCA에서는 [[투사회보]] 제작팀, 들불야학 구성원, 고등학생 등이 있었는데 어린 학생들과 여성들을 대피시키고나니 30여 명이 남았다. 기동타격대는 1조와 3조가 도청 부근을, 2조가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을, 5조가 광주역 부근을, 6조가 도청 옆 상무관을, 7조가 도청 안 2층에 각각 배치되었다. YMCA에서는 예비군들로만 별도로 4개 분대가 구성되어 도청과 계림동 방면으로 출동하였다. 시민군은 당시 상황실장 박남선의 지휘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행동했다. 3시 30분 즈음에 시민군들의 배치는 끝이 났고, 전체 340여 명 정도의 인원이었다. 한편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1950)|윤상원]]은 민원실 2층 강당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계엄군이 조금씩 밀려오는 듯 그 사이에도 총소리가 가끔씩 들려왔다. 새벽 3시 50분에는 홍보부에서 활동하던 [[https://brunch.co.kr/@1980may18/161|박영순]]이 눈물을 흘리면서 마지막 방송을 하였다. 그녀는 도청 상황실 내의 방송실의 기기를 이용해 울먹이면서 방송을 했고, 방송은 도청 옥상의 스피커를 통해 광주 시내에 퍼져갔다.[* [[김영택(1936)|김영택]]을 비롯한 기자들과 광주 시민들은 이 방송이 방송차량에서 나왔다고 여겼다. 그래서 5.18을 다룬 대표적인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도 여주인공이 방송차량을 타고 마지막 방송을 하는 것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 방송의 주인공이었던 [[https://brunch.co.kr/@1980may18/161|박영순]]에 따르면, 방송은 도청에서 진행되었다.] 깨어있던 시민들은 그 방송을 들었고, 두려움에 밖으로 달려나오지는 못했으나 그 목소리를 잊지 못했다. 그러다 방송은 계엄군의 진압이 임박한 새벽 4시를 전후하여 기획위원 이양현이 전원을 내리면서 중단되고 말았다. 이 때에는 이제 계엄군들이 외곽지대는 물론이고 [[https://youtu.be/F9iIn1eYiYc|경고 방송을 하고 행진곡을 울리면서]] 광주 시내에 진입하여 각지의 시민군을 제압하며 전남도청을 옥죄고 있었다. 새벽 4시가 되자, 계엄군은 마침내 전남도청을 완전히 포위했다. 계엄군은 전남도청으로 난입하여 시민군들을 보이는 족족 공격하여 체포하거나 사살했다. 항쟁지도부와 시민군 간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1950)|윤상원]]은 도청 민원실에 있다가 계엄군의 총을 맞고 살해당했으며, 그와 함께 있던 김영철과 이양현은 체포되었다. 정해직, 윤강옥, 정상용, 박남선 등도 계엄군에게 붙잡혀 도청 밖으로 끌려나갔다. 수습위원으로는 유일하게 시민군과 함께 했던 이종기 변호사도 계엄군에게 포박당했다. 그렇게 도청 내의 각 구역은 하나씩 계엄군에게 점령당했고, 시민군들은 하나 둘 저항력을 잃어갔다. 마침내 5시 10분 계엄군은 도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전남도청에서의 진압작전은 성공적으로 종료되었으며 시민군 16명이 목숨을 잃고 200여 명이 체포되었다. 그에 반해 계엄군의 피해는 '''사망자 0명, 부상자 2명'''이 전부였다. 전일빌딩, YMCA, 관광호텔에서는 시민군이 얼마 없었기에 계엄군에 의해 쉽게 제압되었다. YWCA에서는 계엄군과 시민군 간 1시간 정도의 교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도청에서처럼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계엄군을 시민군이 이길 수 없었다. 결국 [[투사회보]] 제작을 담당하던 [[https://brunch.co.kr/@1980may18/124|박용준]]이 피살당하고, 여러 명의 시민군들이 총에 맞아 심한 부상을 입었다. 광주공원에서는 10여 분 정도의 교전이 발생하여 시민군 1명이 사망하였다. 월산동 부근에서는 충돌로 인해 7공수여단 출신 군인 1명[* 이 7공수 대원은 월산동에서 시민군의 총격이 아닌 '''계엄군 간 오인사격'''으로 사망했다.]과 시민군 1명이 사망하였다. 계림국민학교에서는 10여 분 간의 교전으로 15명의 시민군이 체포되었고, 근처에 있던 [[광주고등학교(광주)|광주고등학교]] 수위 양동선(45)이 여기에 말려들어 총을 맞고 사망했다.[* 한편 이날 새벽 계림국민학교에서 20사단 군인 1명이 사망했다. 그는 27일 '''상무충정작전 도중 시민군의 총격으로 유일하게 사망한 계엄군'''이다.] 이렇게 시민군을 차례차례 제압한 계엄군은 새벽 5시경 "폭도들은 투항하라. 너희들은 포위됐다. 총을 버리고 투항하면 생명을 보장한다"라며 KBS를 통해 대대적으로 방송했다. 새벽 6시경이 되자 광주 시내는 계엄군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시민군의 저항이 완전히 분쇄된 것이다. {{{#!folding ※ 5월 27일 진압작전 사망자 : 보기 / 접기 ||<-4> ''5월 27일 진압작전 사망자'' || || [[http://518.mpva.go.kr/518c/info/buryManView.do?site_idx=6&nm=%EC%9C%A4%EC%83%81%EC%9B%90&affilication=&birthplace=&search_m_s_number=&man_class=&deathday_start_yy=1900&deathday_start_mm=1&deathday_end_yy=2018&deathday_end_mm=4&bury_place=006&bury_start_yy=1900&bury_start_mm=1&bury_end_yy=2018&bury_end_mm=4&bury_end_dd=&bury_area_num=&bury_gubun=&admin_search_type=&admin_search_str=&isReqPicture=N&m_s_number=526|윤상원]] || [[http://518.mpva.go.kr/518c/info/buryManView.do?site_idx=6&nm=%EC%A1%B0%EC%9D%BC%EA%B8%B0&affilication=&birthplace=&search_m_s_number=&man_class=&deathday_start_yy=1900&deathday_start_mm=1&deathday_end_yy=2018&deathday_end_mm=4&bury_place=006&bury_start_yy=1900&bury_start_mm=1&bury_end_yy=2018&bury_end_mm=4&bury_end_dd=&bury_area_num=&bury_gubun=&admin_search_type=&admin_search_str=&isReqPicture=N&m_s_number=538|조일기]] || [[http://518.mpva.go.kr/518c/info/buryManView.do?site_idx=6&nm=%EA%B9%80%EB%8F%99%EC%88%98&affilication=&birthplace=&search_m_s_number=&man_class=&deathday_start_yy=1900&deathday_start_mm=1&deathday_end_yy=2018&deathday_end_mm=4&bury_place=006&bury_start_yy=1900&bury_start_mm=1&bury_end_yy=2018&bury_end_mm=4&bury_end_dd=&bury_area_num=&bury_gubun=&admin_search_type=&admin_search_str=&isReqPicture=N&m_s_number=539|김동수]] || [[http://518.mpva.go.kr/518c/info/buryManView.do?site_idx=6&nm=%EA%B9%80%EB%AA%85%EC%88%99&affilication=&birthplace=&search_m_s_number=&man_class=&deathday_start_yy=1900&deathday_start_mm=1&deathday_end_yy=2018&deathday_end_mm=4&bury_place=006&bury_start_yy=1900&bury_start_mm=1&bury_end_yy=2018&bury_end_mm=4&bury_end_dd=&bury_area_num=&bury_gubun=&admin_search_type=&admin_search_str=&isReqPicture=N&m_s_number=346|김명숙]] || || [[http://518.mpva.go.kr/518c/info/buryManView.do?site_idx=6&nm=%EA%B9%80%EC%84%B1%EA%B7%BC&affilication=&birthplace=&search_m_s_number=&man_class=&deathday_start_yy=1900&deathday_start_mm=1&deathday_end_yy=2018&deathday_end_mm=4&bury_place=006&bury_start_yy=1900&bury_start_mm=1&bury_end_yy=2018&bury_end_mm=4&bury_end_dd=&bury_area_num=&bury_gubun=&admin_search_type=&admin_search_str=&isReqPicture=N&m_s_number=461|김성근]] || [[http://518.mpva.go.kr/518c/info/buryManView.do?site_idx=6&nm=%EA%B9%80%EC%A2%85&affilication=&birthplace=&search_m_s_number=&man_class=&deathday_start_yy=1900&deathday_start_mm=1&deathday_end_yy=2018&deathday_end_mm=4&bury_place=006&bury_start_yy=1900&bury_start_mm=1&bury_end_yy=2018&bury_end_mm=4&bury_end_dd=&bury_area_num=&bury_gubun=&admin_search_type=&admin_search_str=&isReqPicture=N&m_s_number=462|김종연]] || [[http://518.mpva.go.kr/518c/info/buryManView.do?site_idx=6&nm=%EB%AC%B8%EC%9A%A9%EB%8F%99&affilication=&birthplace=&search_m_s_number=&man_class=&deathday_start_yy=1900&deathday_start_mm=1&deathday_end_yy=2018&deathday_end_mm=4&bury_place=006&bury_start_yy=1900&bury_start_mm=1&bury_end_yy=2018&bury_end_mm=4&bury_end_dd=&bury_area_num=&bury_gubun=&admin_search_type=&admin_search_str=&isReqPicture=N&m_s_number=347|문용동]] || [[http://518.mpva.go.kr/518c/info/buryManView.do?site_idx=6&nm=%EB%AC%B8%EC%9E%AC%ED%95%99&affilication=&birthplace=&search_m_s_number=&man_class=&deathday_start_yy=1900&deathday_start_mm=1&deathday_end_yy=2018&deathday_end_mm=4&bury_place=006&bury_start_yy=1900&bury_start_mm=1&bury_end_yy=2018&bury_end_mm=4&bury_end_dd=&bury_area_num=&bury_gubun=&admin_search_type=&admin_search_str=&isReqPicture=N&m_s_number=348|문재학]] || || [[http://518.mpva.go.kr/518c/info/buryManView.do?site_idx=6&nm=%EB%AF%BC%EB%B3%91%EB%8C%80&affilication=&birthplace=&search_m_s_number=&man_class=&deathday_start_yy=1900&deathday_start_mm=1&deathday_end_yy=2018&deathday_end_mm=4&bury_place=006&bury_start_yy=1900&bury_start_mm=1&bury_end_yy=2018&bury_end_mm=4&bury_end_dd=&bury_area_num=&bury_gubun=&admin_search_type=&admin_search_str=&isReqPicture=N&m_s_number=349|민병대]] || [[http://518.mpva.go.kr/518c/info/buryManView.do?site_idx=6&nm=%EB%B0%95%EB%B3%91%EA%B7%9C&affilication=&birthplace=&search_m_s_number=&man_class=&deathday_start_yy=1900&deathday_start_mm=1&deathday_end_yy=2018&deathday_end_mm=4&bury_place=006&bury_start_yy=1900&bury_start_mm=1&bury_end_yy=2018&bury_end_mm=4&bury_end_dd=&bury_area_num=&bury_gubun=&admin_search_type=&admin_search_str=&isReqPicture=N&m_s_number=350|박병규]] || [[http://518.mpva.go.kr/518c/info/buryManView.do?site_idx=6&nm=%EB%B0%95%EC%84%B1%EC%9A%A9&affilication=&birthplace=&search_m_s_number=&man_class=&deathday_start_yy=1900&deathday_start_mm=1&deathday_end_yy=2018&deathday_end_mm=4&bury_place=006&bury_start_yy=1900&bury_start_mm=1&bury_end_yy=2018&bury_end_mm=4&bury_end_dd=&bury_area_num=&bury_gubun=&admin_search_type=&admin_search_str=&isReqPicture=N&m_s_number=351|박성용]] || [[http://518.mpva.go.kr/518c/info/buryManView.do?site_idx=6&nm=%EB%B0%95%EC%9A%A9%EC%A4%80&affilication=&birthplace=&search_m_s_number=&man_class=&deathday_start_yy=1900&deathday_start_mm=1&deathday_end_yy=2018&deathday_end_mm=4&bury_place=006&bury_start_yy=1900&bury_start_mm=1&bury_end_yy=2018&bury_end_mm=4&bury_end_dd=&bury_area_num=&bury_gubun=&admin_search_type=&admin_search_str=&isReqPicture=N&m_s_number=464|박용준]] || || [[http://518.mpva.go.kr/518c/info/buryManView.do?site_idx=6&nm=%EB%B0%95%EC%A7%84%ED%99%8D&affilication=&birthplace=&search_m_s_number=&man_class=&deathday_start_yy=1900&deathday_start_mm=1&deathday_end_yy=2018&deathday_end_mm=4&bury_place=006&bury_start_yy=1900&bury_start_mm=1&bury_end_yy=2018&bury_end_mm=4&bury_end_dd=&bury_area_num=&bury_gubun=&admin_search_type=&admin_search_str=&isReqPicture=N&m_s_number=465|박진홍]] || [[http://518.mpva.go.kr/518c/info/buryManView.do?site_idx=6&nm=%EC%84%9C%ED%98%B8%EB%B9%88&affilication=&birthplace=&search_m_s_number=&man_class=&deathday_start_yy=1900&deathday_start_mm=1&deathday_end_yy=2018&deathday_end_mm=4&bury_place=006&bury_start_yy=1900&bury_start_mm=1&bury_end_yy=2018&bury_end_mm=4&bury_end_dd=&bury_area_num=&bury_gubun=&admin_search_type=&admin_search_str=&isReqPicture=N&m_s_number=466|서호빈]] || [[http://518.mpva.go.kr/518c/info/buryManView.do?site_idx=6&nm=%EC%95%88%EC%A2%85%ED%95%84&affilication=&birthplace=&search_m_s_number=&man_class=&deathday_start_yy=1900&deathday_start_mm=1&deathday_end_yy=2018&deathday_end_mm=4&bury_place=006&bury_start_yy=1900&bury_start_mm=1&bury_end_yy=2018&bury_end_mm=4&bury_end_dd=&bury_area_num=&bury_gubun=&admin_search_type=&admin_search_str=&isReqPicture=N&m_s_number=469|안종필]] || [[http://518.mpva.go.kr/518c/info/buryManView.do?site_idx=6&nm=%EC%96%91%EB%8F%99%EC%84%A0&affilication=&birthplace=&search_m_s_number=&man_class=&deathday_start_yy=1900&deathday_start_mm=1&deathday_end_yy=2018&deathday_end_mm=4&bury_place=006&bury_start_yy=1900&bury_start_mm=1&bury_end_yy=2018&bury_end_mm=4&bury_end_dd=&bury_area_num=&bury_gubun=&admin_search_type=&admin_search_str=&isReqPicture=N&m_s_number=470|양동선]] || || [[http://518.mpva.go.kr/518c/info/buryManView.do?site_idx=6&nm=%EC%97%BC%ED%96%89%EC%97%B4&affilication=&birthplace=&search_m_s_number=&man_class=&deathday_start_yy=1900&deathday_start_mm=1&deathday_end_yy=2018&deathday_end_mm=4&bury_place=006&bury_start_yy=1900&bury_start_mm=1&bury_end_yy=2018&bury_end_mm=4&bury_end_dd=&bury_area_num=&bury_gubun=&admin_search_type=&admin_search_str=&isReqPicture=N&m_s_number=471|염행열]] || [[http://518.mpva.go.kr/518c/info/buryManView.do?site_idx=6&nm=%EC%98%A4%EC%84%B8%ED%98%84&affilication=&birthplace=&search_m_s_number=&man_class=&deathday_start_yy=1900&deathday_start_mm=1&deathday_end_yy=2018&deathday_end_mm=4&bury_place=006&bury_start_yy=1900&bury_start_mm=1&bury_end_yy=2018&bury_end_mm=4&bury_end_dd=&bury_area_num=&bury_gubun=&admin_search_type=&admin_search_str=&isReqPicture=N&m_s_number=472|오세현]] || [[http://518.mpva.go.kr/518c/info/buryManView.do?site_idx=6&nm=%EC%9C%A0%EB%8F%99%EC%9A%B4&affilication=&birthplace=&search_m_s_number=&man_class=&deathday_start_yy=1900&deathday_start_mm=1&deathday_end_yy=2018&deathday_end_mm=4&bury_place=006&bury_start_yy=1900&bury_start_mm=1&bury_end_yy=2018&bury_end_mm=4&bury_end_dd=&bury_area_num=&bury_gubun=&admin_search_type=&admin_search_str=&isReqPicture=N&m_s_number=473|유동운]] || [[http://518.mpva.go.kr/518c/info/buryManView.do?site_idx=6&nm=%EC%9D%B4%EA%B0%95%EC%88%98&affilication=&birthplace=&search_m_s_number=&man_class=&deathday_start_yy=1900&deathday_start_mm=1&deathday_end_yy=2018&deathday_end_mm=4&bury_place=006&bury_start_yy=1900&bury_start_mm=1&bury_end_yy=2018&bury_end_mm=4&bury_end_dd=&bury_area_num=&bury_gubun=&admin_search_type=&admin_search_str=&isReqPicture=N&m_s_number=476|이강수]] || || [[http://518.mpva.go.kr/518c/info/buryManView.do?site_idx=6&nm=%EC%9D%B4%EA%B8%88%EC%9E%AC&affilication=&birthplace=&search_m_s_number=&man_class=&deathday_start_yy=1900&deathday_start_mm=1&deathday_end_yy=2018&deathday_end_mm=4&bury_place=006&bury_start_yy=1900&bury_start_mm=1&bury_end_yy=2018&bury_end_mm=4&bury_end_dd=&bury_area_num=&bury_gubun=&admin_search_type=&admin_search_str=&isReqPicture=N&m_s_number=477|이금재]] || [[http://518.mpva.go.kr/518c/info/buryManView.do?site_idx=6&nm=%EC%9D%B4%EC%A0%95%EC%97%B0&affilication=&birthplace=&search_m_s_number=&man_class=&deathday_start_yy=1900&deathday_start_mm=1&deathday_end_yy=2018&deathday_end_mm=4&bury_place=006&bury_start_yy=1900&bury_start_mm=1&bury_end_yy=2018&bury_end_mm=4&bury_end_dd=&bury_area_num=&bury_gubun=&admin_search_type=&admin_search_str=&isReqPicture=N&m_s_number=352|이정연]] || [[http://518.mpva.go.kr/518c/info/buryManView.do?site_idx=6&nm=%ED%99%8D%EC%88%9C%EA%B6%8C&affilication=&birthplace=&search_m_s_number=&man_class=&deathday_start_yy=1900&deathday_start_mm=1&deathday_end_yy=2018&deathday_end_mm=4&bury_place=006&bury_start_yy=1900&bury_start_mm=1&bury_end_yy=2018&bury_end_mm=4&bury_end_dd=&bury_area_num=&bury_gubun=&admin_search_type=&admin_search_str=&isReqPicture=N&m_s_number=354|홍순권]] || [[http://518.mpva.go.kr/518c/info/buryManView.do?site_idx=6&nm=%EA%B6%8C%ED%98%B8%EC%98%81&affilication=&birthplace=&search_m_s_number=&man_class=&deathday_start_yy=1900&deathday_start_mm=1&deathday_end_yy=2018&deathday_end_mm=4&bury_place=006&bury_start_yy=1900&bury_start_mm=1&bury_end_yy=2018&bury_end_mm=4&bury_end_dd=&bury_area_num=&bury_gubun=&admin_search_type=&admin_search_str=&isReqPicture=N&m_s_number=634|권호영]] || || [[http://518.mpva.go.kr/518c/info/buryManView.do?site_idx=6&nm=%EC%A1%B0%ED%96%89%EA%B6%8C&affilication=&birthplace=&search_m_s_number=&man_class=&deathday_start_yy=1900&deathday_start_mm=1&deathday_end_yy=2018&deathday_end_mm=4&bury_place=006&bury_start_yy=1900&bury_start_mm=1&bury_end_yy=2018&bury_end_mm=4&bury_end_dd=&bury_area_num=&bury_gubun=&admin_search_type=&admin_search_str=&isReqPicture=N&m_s_number=353|조행권]] ||<-2> 신원미상[* 이 시신은 5월 27일 사망했다고 기록된 신원미상 시신으로 4세 정도의 남아로 추정되고 있다. 가장 나이가 어린 행방불명자인 7세 소년 [[http://518.mpva.go.kr/518c/info/buryManView.do?site_idx=6&nm=%EC%9D%B4%EC%B0%BD%ED%98%84&affilication=&birthplace=&search_m_s_number=&man_class=&deathday_start_yy=1900&deathday_start_mm=1&deathday_end_yy=2018&deathday_end_mm=4&bury_place=006&bury_start_yy=1900&bury_start_mm=1&bury_end_yy=2018&bury_end_mm=4&bury_end_dd=&bury_area_num=&bury_gubun=&admin_search_type=&admin_search_str=&isReqPicture=N&m_s_number=71250|이창현]]과 관련되어 있다는 행방불명자 유가족의 증언이 있지만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https://imgur.com/9xTOsfg|검시자료]]] ||}}} 진압 직후에 광주의 상황은 처참했다. 거리와 건물에는 사망자와 부상자가 여기저기 방치된 채 있었고, 핏자국도 무수히 많았다. 계엄군들은 죽은 사람들을 끌어내어 한쪽에다가 모아놓았으며, 체포된 사람들에게는 무수한 구타를 가하며 줄을 세워 기합을 주었다. 그들은 시민군이 조금이라도 말을 듣지 않을 시에는 군홧발과 개머리판으로 마구 때렸고, 포박한 이들의 등에다가 '총기소지', '극렬', '실탄소지'라며 혐의를 빨간 펜으로 휘갈겼다. 시민군들은 그 상태에서 굴비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군용트럭을 타고 상무대 등으로 실려가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계엄군은 20사단에게 도청을 인계하였고, 아침 동안 광주 시내에 남은 일부 시민군마저 모조리 잡아들였다. 그리고 거리마다 통행을 막고 검문을 실시했다. 그런 와중에도 계엄군의 발포가 이어져 이금재(29)와 김명숙(15)이 목숨을 잃었다. 모든 진압작전을 끝낸 계엄군은 철수하였고, 기갑학교 소속의 장갑차와 탱크들이 광주 시내를 한 바퀴 돌면서 위력시위를 가하였다.[* 이때 계엄군은 [[When Johnny comes marching home]]을 BGM으로 틀었는데, 시민들이 불렀던 [[훌라송]]이 그 곡을 개사한 것임을 감안하면 정말 철저한 심리적 고문이 아닐 수 없다.] 8시 50분부터는 끊겼던 시외전화가 다시 이어졌고, 경찰이나 공무원 등은 직장으로 복귀하였다. [youtube(utfdTTh3khU)] 1980년 5월 27일 [[KBS 뉴스 9]] 방송분 군부의 언론통제가 어떤식으로 이루어졌는지 단적으로 알수있는 자료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